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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호박 목걸이

by zian지안 2024. 1. 7.

호박목걸이 - 딜쿠샤 안주인 메리 테일러의 서울살이 1917~1948

딜쿠샤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진행했던 특별 전시에서였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확인해 보니 2018-2019년에 진행했던 전시였네요) 지금 생각하면 딜쿠샤의 주인이었던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가 유물을 기증한 뒤, 딜쿠샤가 박물관으로 재 탄생하는 것을 기념하는 전시였던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시기에 외국인이 지은 집이  2차 세계대전과 해방 등 격동의 현대사를 거치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혔다가 우연히 다시 역사에 등장한다는 극적인 이야기는 꽤나 깊은 인상을 주었고, 박물관으로 복원이 되면 반드시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딜쿠샤가 박물관으로 재탄생하던 시기 발생한 코로나19로 인해 딜쿠샤 방문은 한동안 미뤄졌고 코로나19가 마무리된 현시점까지도 딜쿠샤 방문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잊혔던 딜쿠샤를 다시 떠올린 것은 2023년 말 읽게 된 '경성 백화점 상품 박물지'라는 책의 저자를 검색하다가 그가 쓴 다른 책이 딜쿠샤에 관련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기억 속에 깊은 인상으로 남았던 딜쿠샤, 문득 딜쿠샤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졌고, 딜쿠샤의 안주인이었던 메리 릴리 테일러의 '호박 목걸이'를 손에 들었습니다.


호박 목걸이는 태평양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 미국인인 테일러 부부가 서울에서 쫓겨나는 긴박한 과정으로 시작합니다. 일제의 추방 압력을 굳건하게 거부하며 서울에 남으려고 하는 테일러 부부의 모습과, 결국 추방당하면서도 딜쿠샤와 서울에 대한 추억을 최대한 가져가려는 노력은 테일러 부부가 단지 몸만 서울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국과 한국 사람들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책의 제목인 '호박 목걸이'는 저자인 메리 테일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온 호박목걸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메리 테일러가 일생에 걸쳐  추구해 온 삶에 대한 의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마음을 사로잡은 호박 목걸이를 부모님 몰래 착용하고 놀다가 목걸이가 끊어져 구슬 일부를 잃어버리고, 이후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도중 사고로 또다시 목걸이 대부분을 잃어버린 이후, '동양에 가면 호박 목걸이가 있을 것 같아' 당시로서는 위험한 지역이었던 동양으로 향하게 되었으며, 호박 목걸이가 계기가 되어 일본에서 앨버트 테일러를 만나고, 일제에 의해 추방되는 순간에도 몸에 지니고 있었던 호박 목걸이. 호박 목걸이는 메리가 가야 할 삶의 방향이자 결과였습니다.

당시 일반적인 영국의 귀족 여성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삶에 주체적이고 도전적이었던 메리는 친구들처럼 신부학교에 다니는데 만족하지 못하고 연극배우가 되어 세계를 돌아다니다 일본에서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를 만납니다. 첫 만남부터 서로 통했던 두 사람을 결정적으로 맺어준 것 또한 호박 목걸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가짜목걸이를 그에게 건넸고, 그는 자기 호박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주었다...(중략)... 그가 그 구슬을 소매에 비빈 다음 내 머리카락에 갖다 대니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이래서 나는 호박을 좋아합니다" 그가 말했다. "끌어당기는 힘이 있거든요"

그렇게 마음이 끌린 두 사람은 잠시 헤어졌으나 인도에서 다시 만나 결혼합니다. 인도를 여행하던 시기 메리가 본 인상 깊은 건축물,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 희망, 이상향'을 뜻하는 '딜쿠샤'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언젠가 보금자리를 만들면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마음먹습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광산사업을 하고 있던 앨버트 테일러를 따라 1917년 서울에 신혼집을 차린 테일러 부부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아들을 낳고, 앨버트 테일러는 3.1 운동의 소식을 해외에 전달하기는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조선에서의 삶이 어색하고 '위아래가 뒤집힌' 나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곧 조선사람들의 문화와 삶을 이해하고 따스한 시선으로 그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조선말~일제강점기 시기의 외국인이 쓴 책을 읽어보면 조선 사람들의 게으름과 부도덕함을 지적하는 내용이 많은데, 테일러 부부는 시종일관 조선인들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공 서방의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러 가야 했다고 김 보이가 통역해 주었다. 다음에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고, 나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다 잊고는 할머니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저 사람, 거짓말하고 있어요." 내가 브루스(주:앨버트 테일러는 자신을 부르스로 불러달라고 했으며, 아들에게 브루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에게 말했다. "저 사람은 반드시 해고해야 해요"
"그렇게 성급히 결정하면 안 돼요, 여보. 그건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중략)... 한국 사람들은 거짓말을 도덕적으로 큰 죄로 생각하지 않는다오. 우리가 은유를 이리저리 섞어 에둘러 말하는 것 정도로 여기지." 브루스의 말이었다,
브루스는 공 서방을 부르더니 멋쩍은 표정으로 앞에 서 있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 서방, 자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니 참으로 애석하네. 다시는 할머니를 돌아가시게 하지 말게!" 그러고는 그를 돌려보냈다.
"왜 공을 서방이라고 불렀어요?" 내가 물었다"
"그를 존중한다는 걸 보여주고 그의 체면을 세워준 거요. 동양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일종의 예의일 때가 종종 있다오."

어느 날, 서울 성벽을 따라 산책하던 테일러 부부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서 있는 언덕에 매료됩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들은 은행나무 언덕(행촌동)에 그들의 보금자리를 짓고 이름을 '딜쿠샤'라고 짓습니다. 하지만 은행나무를 신령으로 생각하고 있던 동네 주민들은 소동을 일으키고 무당이 나타나 테일러 부분에게 저주를 내리기도 합니다. 그 때문이었을까요, 딜 쿠샤를 완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인 앨버트의 건강이 악화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편 앨버트의 건강 문제로 미국으로 몇 년간 복귀한 동안 딜쿠샤는 벼락을 맞아 집의 대부분의 불에 타는 불운을 겪습니다. 앨버트의 건강이 회복되고 조선으로 돌아와 보니 집안일을 봐주던 '김보이'는 사망했고,  앨버트가 조선에 왔던 시기부터 두 사람이 모은 여러 가구들과 그들의 추억이 담긴 여러 물건들이 전부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좌절하고 있는 메리에게 앨버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부 사라졌어!" 나는 맥이 빠졌다. "집의 심장이었던 것들이......."
"심장은 아니오." 브루스가 힘주어  내 말을 바로잡았다. "위장 정도였지. 심장은 당신이 다시 살려 놓을 수 있소"
... (중략)...
"찌그러진 호박도 다시 환하게 빛나는 구슬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이쯤 되면 두 사람의 삶에 대한 의지에 감탄하게 됩니다. 이후로도 두 사람은 일제 강점기 조선에 거주하던 외국인 커뮤니티의 주요 일원으로 다양하게 활동합니다. 그 과정에서 부부는 일제의 지배를 받던 조선인들의 설움과 독립을 위한 열망에 공감하고,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메리는 사업가인 앨버트를 따라 조선의 여기저기를 방문하기도 하고, 앨버트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대륙을 건너 영국에 다녀오기도 합니다. 교통이 편리해진 현대에도 쉽지 않은 여행을 19세기 초에 살던 여성이 누구보다 활발하게 다녔다는 게 놀랍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조선에서 테일러 부부의 삶은 점차 위태로워집니다. 태평양 전쟁의 상대국인 미국인 테일러 부부는 일본의 노골적인 감시와 압박을 받습니다. 결국 1942년, 앨버트는 6개월간 수감되고 메리는 집에 연금된 후 부부는 미국으로 추방됩니다. 두 사람은 미국에 다시 정착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조선에 조선에 돌아가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조선이 독립하여 대한민국이 된 이후에도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앨버트는 1948년 사망하게 됩니다. 사망하기 전 앨버트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냐는 질문에 (반어법으로)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난 절대로 돌아가지 않아. 메리가 납으로 된 작은 상자에 나를 담아 데려다줄 때까지는." 4분의 1쯤은 농담이었지만 4분의 3쯤은 진심이었다.

1948년 메리는 남편의 유해를 가지고 한국땅을 다시 밟습니다. 하지만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 있던 한국은 6년 전과는 달랐고, 딜쿠샤는 이미 예전 모습을 잃고 여러 사람들이 들어와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메리는 화를 내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사람들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 준 것으로 만족합니다. 

"심장은 당신이 다시 살려 놓을 것이오." 이 집을 다시 짓고 처음 들어왔을 때 브루스는 그렇게 말했었다.
.. (중략)...
인간사 무릇 그러하듯이 이 집이 또다시 큰 고난을 겪게 되고, 나의 호박 목걸이마저 사라진다 해도, 우리가 사랑으로써 우리의 일부로 만들었던 그것들은 영원히 지속되며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메리 린리 테일러는 1982년 사망합니다. 그의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는 어머지의 기록을 모아 '호박 목걸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합니다.

딜쿠샤는 6.25 전쟁과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 동안 역사에서 잊혔다가, 문화재 조사 중 "DILKUSHA 1923"이라는 명판이 발견되고 2005년 브루스 테일러의 의뢰를 받은 서일대학교 김익상 교수가 테일러 부부의 딜쿠샤라는 사실을 찾아냅니다.

어린 시절을 딜쿠샤에서 보낸 브루스 테일러는 2006년 딜쿠샤를 방문하였고, 2015년에 그가 사망한 뒤 2016년 딸인 제니퍼 테일러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유물을 서울 역사박물관에 기증합니다.

이후 딜쿠샤 복원 논의가 이루어졌고, 딜쿠샤 거주민과 협의를 거쳐 2021년 3월 1일에 박물관으로 개장합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