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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삼체-류츠신

by zian지안 2020. 2. 24.

휴고상은 SF 소설계에 가장 권위 있는 상입니다. 아서 C. 클라크,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A. 하인라인, 필립 K. 딕등 내로라하는 SF소설가들은 한번 이상 휴고상을 받았고, SF 팬이라면 휴고상 수상작에 오른 작품들은 한 번쯤을 읽어봐야 하는 소설들입니다.

서양 작가들의 전유물이었던 SF 소설계에서, 아시아 최초로 휴고상을 받은 작품이 바로 '삼체'입니다. SF라는 장르가 거의 활성화되지 못한 한국이나, 판타지물 위주로 활성화되어있는 일본과는 다르게 중국은 SF라는 장르에 대한 독자들의 수요가 꽤나 있다고 합니다. 단순하게 인구를 생각해 봐도 꽤 시장 규모가 클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고상을 수상할 수 있을 정도의 환경이나 '유랑 지구'와 같은 SF영화 제작 역량들을 생각해 보면 중국은 앞으로도 아시아 SF 장르계를 이끌어갈 만한 잠재시장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작품으로 돌아가서, '삼체'는 고전역학의 '삼체문제'에서 나온 제목으로, 지구와 같이 하나의 항성이 아닌 3개의 항성을 지닌 외계의 행성 인류와 지구 인류 간에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 항성이 영향을 주는 외계행성'이라는 설정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전설의 밤'에서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마치 현실에서 벌어질(졌을) 것 같은 이야기를 나름의 충실한 과학적 고증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하드 SF에 속하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삼체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삼체 문명을 게임 소프트웨어 시뮬레이션의 현실성이나, 컴퓨터 공학 이론에 대한 상세하고 현실적인 설정들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실제로 작가인 류츠신은 컴퓨터 엔지니어라고 합니다). 그 외에 천체 물리학이나 양자역학에 대한 설정들도 현실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삼체'가 단순히 지구와 외계 문명 간의 이야기였다면 휴고상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작가는  중국의 '문화 대혁명'을 작품의 역사적 배경으로 택하고 있습니다. 문화 대혁명 과정에서 주인공이 겪게 되는 역사의 풍랑, 그 과정에서 형성된 주인공의 신념, 결국 하나의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중국 현대사의 비극적 현실을 과감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이 더 가치가 있습니다. 

3권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1권은 SF가 아니라 중국 현대사를 되돌아보는 순수 문학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휴고상을 수상할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속작으로 가면, 1권의 무게감은 많이 덜어낸 SF소설로 변모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서 C. 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뷰' 1권과 후속작을 읽었을 때의 차이 정도랄까, 작품의 세계관은 확장되지만 작품이 담고 있는 무게감이나 주제는 가벼워지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2권 초입에서 독서를 진행하기가 조금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곧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다음장에는 어떻게 될지 궁금하게 만드는 스토리 때문에 장편소설로도 꽤 분량이 됨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2권과 3권은 작품의 무게감을 덜어 낸 대신, 몰입도와 내용의 진행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집니다. 본격적으로 지구 문명과 삼체 문명의 조우가 이루어지고, 삼체 문명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인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시험하게 됩니다. 그 선택에 대한 과학적 이론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면서 과연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이 부분에서 동양적 정서에서만 나올 수 있는 '면벽자'와 설정들은 한편으로는 친숙하면서도 SF라는 장르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정서이기 때문에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서양의 SF가 꼼꼼한 과학적 설정이나 논리적 인과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매력이 있다면, 삼체의 주인공은 동양 사상을 기반으로 한 선문답과 같은 대화와 행동으로 결말이 어떻게 될지 계속 궁금함을 유발하고 결국에는 주인공의 '큰 그림'으로 마무리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1권이 역사적 배경과 인류의 존재에 대한 문제의식을 함유한 매력이 있는데 비해, 2권과 3권은 거의 판타지나 스페이스 오페라에 가까운 소설로 변하는 점은 조금 아쉽습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 같은' 다양한 과학이론이 총동원되고, '거의'현실감 있게 그려지고는 있지만 전반적인 이야기의 진행이 작위적이고 기존 SF에서 상상하던 거의 대부분의 요소들을 대부분 사용하고 있어서, 2권과 3권은 나중에는 베르나르 베르베르(비하의 의미는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베르베르의 팬이기도 하고...)의 작품을 읽는 듯했습니다. 때문에 혹시나 시간이 별로 없다면 1권만, 추가적인 재미를 느끼고 싶다면 2권과 3권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실제로 휴고상을 받은 건 1권이고, 2권과 3권은 후속작이기도 합니다.) 

장편이기 때문에 분량이 꽤 많고 다양한 사건과 내용이 그려지고 있는 소설로, 딱 잘라서 어떻다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1권, 2권, 3권의 세계관은 동일하지만 주인공도 다르고 각 주인공들이 처하는 현실이나 대처방식도 각각 다릅니다. 어떻게 보면 동일한 세계관을 가진 각기 다른 3편의 소설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기존 SF와 다른, 동양적 의식을 가진 SF 또는 스페이스 오페라물에 관심이 있다면 충분히 재미있게 빠져들 수 있는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