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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by zian지안 2024. 1. 28.

만문만화로 보는 근대의 얼굴 - 신명직

"만문만화" 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현대에 신문에 연재되는 만화는 주로 4컷짜리 또는 1컷짜리 시사 만화입니다만, 일제 강점기이던 1920~1930년대 신문과 잡지에 연재되었던 만화의 한 장르입니다. 만문만화의 형식은 문자 그대로 만문(漫文, 흐트러진, 정식이 아닌 글)과 만화(漫畵,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그림)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 만들어진 형식입니다. 만화가 순수 예술로서의 그림과 다른 장르인 것 처럼 만문도 고급스러운 문학이나 시사 비평이 아닌 잡스러운 글을 의미합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만문만화라는 장르가 나오게 된 것은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1920년대 중반까지 조선 신문에서는 시사 만화나 풍자만화 장르도 유행하고 있었지만, 1924년부터 조선총독부의 언론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되는 만화도 사회 비판을 할 수 없게 되자 탄압을 우회하기 위한 실험적인 장르로 만문만화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만문만화의 유래가 된 일본의 만화만문( 漫畵漫文)이 1910년대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에 대한 탄압을 피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식민지 조선에서 "예리하고 풍자적이기는 하지만 심하게 불쾌하지 않고, 잔혹하지 않은" 만문만화라는 장르가 생겨나게 된 것도 본격적인 사회 비판을 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탄생하게 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는 식민지 조선 만문만화로 활약한 안석영의 작품 위주로 작품에 그려진 당시의 시대상을 엿보고 있습니다. 식민지 사회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을 그리기도 하고, 허영에 빠져 사는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을 비판하기도 하며, 새롭에 유행하는 영화와 음악을 소개하는등 짧은 글과 한장의 그림으로 표현했던 만문만화는 그 어떤 역사 기록과도 다른 소박하고 현실적은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만문만화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극심해진 일제의 언론탄압 과정에서 탄압을 받았고, 만문 만화를 통해 시대상과 식민지인들의 고통을 그리던 윤석영은 친일로 돌아서며 결국 만문만화라는 장르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과거의 유산으로 남았습니다. 

다양한 만문만화를 읽으며 당시의 생활상과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들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었던 반면, 아무래도 출판된지 꽤 시간이 지난(2003년) 책이기 때문인지 조판 구성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각 장의 주제별로 주요한 만문만화를 별도로 구성한 것은 좋았으나, 전반적으로 글에서 설명하는 만화가 동일한 페이지에 표시 되지 않아 책을 앞으로 뒤로 뒤적여 가면서 봐야 하는 경우가 너무 잦았고, 설명하는 내용이 수십페이지 앞이나 뒤에 있는 그림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책의 구성은 조금 아쉬웠지만, 만화와 글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좀 더 날것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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