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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걸리버 여행기

by zian지안 2020. 4. 9.

고전 읽어보기를 하다 보니, 제목만 들어도 내용을 다 알고 있고, 이미 읽은 것 같지만 사실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작품들을 보게 됩니다. '걸리버 여행기'도 그런 부류의 작품들 중의 하나입니다. 소인국과 거인국에 대한 이야기는 동화책이나 청소년을 위한 요약본에 수없이 등장해서 익숙하지만, 소설의 전체 내용을 읽은 적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여러 미디어 믹스로 유명한 라퓨타라는 이름이 걸리버 여행기에 나온다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걸리버 여행기가 17~8세기를 배경으로 한 풍자소설이라는 것은 한참 나이를 먹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풍자의 핵심적인 내용은 소인국과 거인국이 아닌 읽어보지 못했던 라퓨타와 후이늠 이야기에 들어있다는 사실 또한 걸리버 여행기를 완역본으로 읽어보아야겠다는 동기를 주었습니다.

소설은 총 4개의 여행기의 모음인데, 많이 소개된 릴리펏(소인국)/브롭딩낵(거인국) 이야기와 이어지는 라퓨타/후이늠 이야기의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앞부분은 신비한 나라들을 흥미 위주로 이야기하며 풍자적인 성격을 은유 속에 은근히 내비치고 있는데 비해 라퓨타나 후이늠 여행기에서는 보다 본격적으로 풍자를 이어갑니다. 

소인국에서 벌어지는 '하찮은 것'들로 인한 갈등과 싸움을 조롱하던 걸리버는, 거인국에서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문명과 기술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며 스스로가 작은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라퓨타에서 이르러서는 현실 생활에 전혀 쓸모없는 학문과 연구들에 집착하는 학자들을 풍자하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야만적인 인간(야후)들이 이성적인 말들에게 지배당하는 말(馬)의 나라 후이늠에서는 야후의 야만성이 결국 인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 좌절하며 결국 인간 혐오증에 빠지는 걸리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작가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이러한 걸리버의 여행기를 통해 당대의 영국 상황을 풍자하면서 쓸모없는 당쟁, 실용성은 없는 학문만을 위한 학문, 인간의 탐욕과 비이성 등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어릴 적 동화로만 '걸리버 여행기'를 접했다면, 완역본을 보는 경험을 통해 같은 작품을 놓고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17~8세기의 소설이고, 당대의 현실을 풍자하고 있지만 그 풍자의 대상이었던 인간 사회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고전 명작의 생명력이 왜 현재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 고전을 왜 읽어야 하는지 한 번 더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작품이었습니다.